「멀리메일 : 삿포로ㅡ오타루」

5년 간의 책방 근무를 마무리하고 혼자 떠난 설원 여행. 여행 중에 여행기를 발신하는 [멀리메일]의 첫 시리즈.

[멀리메일 : 삿포로ㅡ오타루] DAY 1

그곳에 가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


새로운 걸 보고 싶다는 호기심보다

보던 걸 얼마간 외면하고 싶다는 

서늘한 마음이 들 때 나는

떠나기로 한다


나는

나의 권태를 달랠

의무가 있다


멀리로 가자.


DAY 1.

2022. 12. 05. 월요일.


12:12

공항에서 열차를 타고 삿포로로 이동 중이다. 딴에 일본 몇 번 와봤다고 헤매지 않고 눈치껏 탑승했다. 눈이 쌓여 있다고 해서 서울보다 추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오히려 인천공항이 더 추웠던 것 같다. 물론 아직 삿포로에 도착한 것은 아니라서 그곳의 날씨는 더 추울지도 모르겠다. 아직 40분 정도 더 가야 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는 눈이 덤덤하게도 쌓여 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풍경이 아니라 그저 쌓여만 있는 풍경이라 그런지, 추위보다는 두터움을 생각하게 된다. 가장 두터울 수 있는, 가장 따뜻할 수 있는 겨울.


바람. 바람만 덜해도 버틸 만하다. 비가 내릴 때도 눈이 내릴 때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나는 계속 길을 걸을 것이다. 젖는 건 상관없다, 내가 휘청거리는 것도 상관없다. 다만 같은 길을 가던 사람이 바람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길 자체를 떠나고 싶게 함으로... 많은 길을 떠나왔고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확보하고자 지난 몇 년을 서성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있는 장기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공항청사로 들어갔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8시 반 비행기. 공항에 이만큼 빨리 온 건 처음이었다. 이것은 내가 멀리메일을 하면서 생성된 긴장감과 책임감 때문이다. 나는 적당한 책임감이 필요하다. 너무 큰 책임감은 말고... 어떤 역할로서 주어진 책임감 말고, 내가 꾸리고 벌인 일들로, 나 자체가 일이 되었을 때 마련되는 책임감. 어쩌면 회사라는 조직을 오래 다니지 못하는 것은 이 에고성 책임감 탓일 것이다. 내가 아닌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무능함. 이런 상태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견디지 못하는 나를 존중한다.


사실, 존중한다는 표현은 그 앞 문장에서 존경한다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억지로 붙인 면이 있다. 나는 이런 부분을 지나치기가 어렵다. 단어를 보면 팀을 구성해주고 싶다. 짝을 지어주고 싶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동선과 안무를 짜주고 싶다. 단어들도 사람들도 짝이 있는 모습에 안정감이 든다. 나도 언젠가는, 그리고 지금도 늘, 짝에 대한 열망이 있다. 나의 이 뜨거운 바람이 삿포로의 눈을 한 발짝 정도는 녹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열망, 희망, 갈망, 소망.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짝꿍이 아닌 단짝. 둘만으로 세상을 이루는, 한 켤레의 세계. 맞은 편에 앉은 사람들 발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발 왼발 다른 신발을 신은 사람은 없다.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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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

삿포로에 도착한 지 2시간이 지났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돈가스집에 와 있다. 삿포로에 도착하자마자 추천받은 스프카레집으로 향했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단숨에 포기하고 조금 더 걸었다. 눈이 송송송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눈 쌓인 길 위를 아장아장 걸었고, 아직 아장아장하지 못한 아기들이 엄마들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나는 식당이 줄을 서면 가지 않는 편이다. 맛에 대해 기준이 높은 편도 아니어서 맛집을 못 갔다고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간 곳이 만약 줄이 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우연을 만날 기회라 여기고 그 줄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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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에 대한 기준이 높지 않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기준이 높으면 매일 하는 식사가 만족스럽기 어려울 것 같아서다. 나의 경우 문장과 호흡과 단어 선택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에, 텍스트에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국내 여행을 가면 지방 고유의 언어 구사에 재미를 느끼고, 이렇게 해외여행을 오면 문자적 해방감을 느낀다. 어쩌면 줄을 서지 않는 나의 면모는, 나라는 사람이 사회의 커리큘럼을 수행하기 힘든 사람이 된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나는 '사람들'보다 '사람'이 보고 싶고, 나도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으로 구별되고 싶었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돈가스가 나왔다.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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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베리 호또."라고 말하며 물컵을 주는 직원. 물컵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베리 호또는 아마도 VERY HOT인 것 같다. 직원은 내게 조심하라고 말해주었겠지만, 나는 '얼마나 뜨겁길래?' 하는 생각으로 입을 갖다 대본다. 베리 뜨겁다.  15:18


17:54

빈티지샵과 안경점을 구경했다. 다행히 나를 사로잡는 건 없었다. 4시쯤 해가 졌던 것 같은데, 눈발이 세지고 온도가 떨어져서 센 커피를 한 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아까 줄이 길었던 스프카레집이 나왔다. 아까보다 줄이 더 길었다. 얼마나 맛있길래? 라는 생각보다는 직원들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성스럽게 일하고 싶다. 붐비고 줄 서는 상황 속에서 정성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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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니는 귀까지 푹 눌러쓰고, 목도리는 꽁꽁 싸맨 채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가로등이 듬성듬성해질 만큼 외진 곳으로 왔다. 점포들은 문을 닫고 있었고 가게 바깥의 짐을 가게 안으로 넣고 있었다. 짐을 들고 있는 남자는 나에게 먼저 지나가라고 했다. 짐을 들고 있어도 양보해준다. 몸에 배어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담배 냄새가 배고 있다. 구글맵을 켜고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흡연이 가능한 곳이라고 해서 더 솔깃했다. 물론 나는 담배를 피지 않지만, 여행에서는 이곳에서만 가능한 문화가 있으니까. 클래식한 분위기의 공간과 달리, 까만 빵모자에 카키색 멜빵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메뉴판을 건넨다. 온통 일본어다. 나는 잉글리시 메뉴가 있냐고 물으려다가 아까 돈가스집에서 배웠던 말을 했다. "호또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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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만들어졌다. 내 앞에 먼저 잔을 놓고, 그 안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잔을 데웠다. 정성스럽게. 그리고 뜨거운 물을 버린 다음, 따로 내린 커피를 내 잔으로 한 번에 부었다. 밖으로는 조용한 눈발이 날리고 안으로는 조명들이 희망처럼 모여 있었다.


크리스마스 풍의 재즈가 흐른다. 나는 바 자리에 앉았는데, 두 남자 사이에 앉아 있다. 내 왼쪽에 앉은 남자는 장발에 청남방을 입은 젊은이다. 녀석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커피잔은 비어있고 디저트 접시에는 부스러기만 남아있다. 녀석이 피우는 담배, 그 연기가 출구 쪽으로 향하기에 나를 덮고 내 커피도 덮고 내 오른쪽 남자도 덮는다. 가게 곳곳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칙칙 들린다.


내 오른쪽에 앉은 남자는 흰머리가 정갈한 어르신이다. 책을 읽고 있다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책을 덮고 라이터를 든다.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가죽 지갑에서 동전을 꺼낸다. 왼손바닥에 올린 동전을 오른손 검지로 정확히 센 다음 멜빵바지 바리스타에게 건넨다. 그가 나가고, 베이지색 떡볶이 코트를 입고 머리에 핀을 꽂은 여자애가 들어온다. 소니 헤드폰을 벗으며 커피를 주문한다. 이 아이도 담배를 피울까. 나는 이제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는 장면을 감상할 것이다. 이곳의 담배 냄새는 두터워서 싫지가 않다.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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