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메일 : 삿포로ㅡ오타루」

5년 간의 책방 근무를 마무리하고 혼자 떠난 설원 여행. 여행 중에 여행기를 발신하는 [멀리메일]의 첫 시리즈.

[멀리메일 : 삿포로ㅡ오타루] DAY 2

DAY 2

2022. 12. 06. 화요일


14:42

둘째 날 오후. 지금은 삿포로역에서 오타루 역으로 가는 열차 속에 있다. 난방이 잘 된다. 패딩을 벗고 이 노트를 꺼내 펼쳐서 지금 이렇게 글자를 적고 있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열차의 차창 밖은 점점 더 하얘진다. 눈의 도시에서 눈의 마을로 가고 있다. 도시가 아니라 마을로 여행을 가는 일. 산을 가리는 건물이 없어서 먼 산도 보이는 일. 높이 세우려는 욕심 없이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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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고, 따뜻한 열차에 있으니 나른해진다. 숙소에서 10시에 일어나 11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라멘을 먹을까 수프카레를 먹을까 하다가, 갑자기 오기가 생겨 어제 줄이 길던 수프카레집 오픈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30분이었다. 슬슬 걸어가면 오픈 전에 도착할 것이고, 줄을 안 서도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카레집이 보이기도 전에 줄이 먼저 보였다. 나는 발걸음을 돌리려다 지하 1층 식당 입구까지 내려가 보았다. 계단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손에는 작은 종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번호표. 나는 1人을 누르고 19번 번호표를 받았다. 내 앞에는 34人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른 수프카레집으로 향했다. 그 집은 2층이었는데 1층까지 줄이 길었다. 오늘이 세계수프카레의 날인가 싶었다. 아까 받았던 19번 번호표에 찍힌 QR코드를 스캔하니 LINE을 통해 대기 현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14번이 입장 대기 중이었다. 어느덧 다섯 팀만 지나면 내 차례라고 하니 다시 첫 번째 카레집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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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

쓰다가 창밖으로 바다가 펼쳐져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염없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떠나오기 전에는 나조차 몰랐지만, 나는 이런 하염없음이 필요했다. 곧 오타루 역에 도착한다. 눈보라가 날린다. 안경을 벗고 비니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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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

영화 <윤희에게>에 나왔던 카페에 와 있다. 나를 울린 영화는 참 많지만 오열시킨 영화는 몇 없는데, 몇 년 전 씨네큐브에서 봤던 <윤희에게>는 내가 오열하기에 충분했다. 조용한 마을에서 조용히 늙어버린 사람의 조용한 이별 이야기. 어쩔 수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이유로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인 군산에도 여러 번 갔고, 갈 때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으며 영화 속 배경지를 발견했던 이력이 있다. 이력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영화 밖에서 영화 속을 찾은 일도 이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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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는 어김없이 자리 안내를 받았다. 커피 머신이 바로 앞에 있는 자리라서 미안하단다. 눈 오는 겨울에 걸맞게 밀크티를 주문했다. 어제 삿포로에서도 오늘 오타루에서도, 나의 자리를 정해준다. 일본은 이번에 네 번째 여행인데, 아마 이전에 왔을 때도 자리 안내를 받았을 것이다. 이 면모가 이제야 보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 내가 앉은 자리로 따뜻하게 데운 물수건과 투명한 컵에 따른 물을 가져다준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덕분에 나는 정말로 '손님'이 된 기분이 든다. 손님이 오기 전에 우리는 준비를 마쳤고, 이제 그 준비를 경험해보시죠. 내 생활과 내 일에는 이런 준비가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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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또 오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 있고, 이런 부분을 느낀 이상, 내 생활에 적용할 맵시를 고민해야 한다. 좋은 면모를 감각했음에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작가로서 업무 태만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여행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서비스지만, 누구나 감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조금 더 민감하게 발견하고 조금 더 쉽게 전달할 뿐이다. 그런 효용으로 나는 기능하고 내 문장은 구입된다. 커피머신의 진동과 분쇄된 원두의 향이 난다. 나는 이 진동과 이 향으로 이곳을 기억할 계획이다.


16:01

오타루로 오는 열차에서 본 눈은 정말 감동이었다. 언젠가 이성복 시인의 시론 중에 '바다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라는 문장에 며칠을 녹았던 적이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문장이 역사적 유적지인데, 오늘 드디어 그 유적을 목도한 것이다. 쓰는 사람으로서 점점 느끼는 것은, 본 만큼 쓸 수 있다는 것. 외면한 만큼 굳어버린다는 것.


16:03

점심때 먹은 수프카레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 한다. 불과 어제만 해도 줄이 긴 식당은 가지 않는다고 했던 나란 놈이었다.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줄이 길었을 때가 아니라 짧아졌을 때 간 것이긴 하다... 아무튼. 삿포로에 간다고 하니 지인이 많은 곳을 추천해주었다. 그 지인은 서로 전화번호도 모르고 내가 북페어에 참가하면 이따금 손님으로 인사하는 분이었는데, 홋카이도 여행 책을 낸 분이었다. 이력이 있는 사람. 삿포로와 오타루의 반짝이는 가게들을 은은하게 추천해주셨고 수프카레집도 그중 하나였다. 이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는데, 추천받은 곳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그래도 어색한 사이에 나눌 얘기까지 없어질 테니, 최대한 믿고 최대한 방문하자는 마음이었다. 그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여러모로 굉장히 감도가 높아 보이기도 한다. 심사위원으로 치자면, 높은 점수를 잘 주지 않는 사람이라기보다 점수 자체를 잘 주지 않는 사람 같달까...


16:11

14번 팀이 입장하고 내 번호인 19번까지 카레집 내부에서 기다렸다. 줄이 길게 늘어선 바깥과 달리 가게 내부는 순조로웠다. 붐비는 곳에서 정성스러울 수 있을까 싶었던 어제에 근거하면, 내부는 붐비지 않았고 덕분에 정성스러워 보였다. 가게 내부에서 기다린 시간만 10분이 좀 넘었던 것 같은데, 내 생에 첫 수프카레는 성공적이었다. 농도 짙은 카레에 고기는 부드럽고 구운 채소는 달콤했다. 사람들이 기다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뭐야 수프카레 이제 한 번 먹어놓고서는?'이라는 반성도 들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다른 수프카레도 먹고서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이게 좋은 게 맞는지. 더 좋은 것도 있는지. 비교해보고 싶어지는 것. 관심이 생겼다는 징조. 글쓰기에 관심이 생기면 나의 문장과 다른 사람의 문장을 비교해보게 되고, 관심 있는 사람이 생기면 나와 그 사람을, 그 사람과 나의 전 사람들을 비교해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16:14

어제는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를, 오늘은 줄을 서야 하는 식당을.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다. 이런 의외가 나는 만족스럽다. 아니, 의외들이 맛있었던 덕분이다. 담배 연기 속 커피가 맛이 없었다면, 긴 웨이팅 속 카레가 맛이 없었다면... 수프카레의 맛에, 의외의 선택이 준 감칠맛까지 더해져 가게 직원들이 입은 반팔 티셔츠도 구매하고 싶었으나 S 사이즈밖에 없어서 단념했다. 그러니까 어디 갔어요? 어제의 나?


16:21

내가 만약 식당이라면 예약제로 운영하는 곳이고 싶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모실 수 있는 만큼만, 그날그날 신선한 재료로만. 냉동실에는 얼음이랑 아이스크림만 보관하고 싶다. 카페 창밖으로 해가 지고 눈이 내린다. 삿포로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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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

오타루의 스시집. 음악은 없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단체 손님이 나갔다. 가게에는 주방장과 나 이렇게 둘 뿐이다. 전부 빈 자리지만 여기도 자리를 정해준다. 메뉴판에는 영어로 적혀 있다. 오타루의 수많은 스시집에서 우리 가게를 찾아주어 감사하다고. 실제로, 여기 오기 전에 구글맵을 보고 4~5곳의 스시집에 갔는데 전부 불이 꺼져 있었다. 반복되는 문 닫음에 나는 실망하기보다 리듬감을 느꼈다. 나는 오늘 스시를 먹을 거고, 계속 찾다 보면 한 번은 엇박이 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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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스시 한 접시와 사케 한 병을 다 비웠다. 사케는 호또 사케였다. 만족스럽다. 가게에는 어느새 세 팀이나 들어왔다. 다 일본인이었는데, 단골이 들어오니 주방장이 높은 목소리로 반겼다. 그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사람 냄새는 물씬 풍겼다. 매대 옆 구석에 붙어있는 강아지 사진 덕분이었다. 다른 가게들이 닫은 덕분에 이곳에 자리할 수 있었다. 나는 자주, 가능하다면, '때문에'라는 단어보다 '덕분에'라는 단어를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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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식사 전에 받았던 뜨거운 차를 한 잔 더 받았다. 천천히 있다 가라는 인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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