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메일 : 삿포로ㅡ오타루」

5년 간의 책방 근무를 마무리하고 혼자 떠난 설원 여행. 여행 중에 여행기를 발신하는 [멀리메일]의 첫 시리즈.

[멀리메일 : 삿포로ㅡ오타루] DAY 3

DAY 3

2022. 12. 07. 수요일


041b8c2bb9497.png

fd41e65cd67e9.png




b88b593e1eaf0.png

10:20

가려던 카페가 휴업이라 그다음 코스였던 라멘집에 조금 일찍 왔다. 숙소에서부터 1시간 정도를 걸어온 것 같다. 눈길은, 걸어야만 안전한 길이다. 뛰거나 달리면 위험하다. 하얀 풍경에 사로잡혀서 자주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켰다. 이토록 하얀 마을을 거닌 적이 있었던가. 나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걷다가, 괜히 뒤로도 걸어보고 멀리 장갑도 던져봤다. 몸에 점점 열이 올랐다.


10:24

건너 테이블의 두 사람. 각자의 그릇으로 마주 앉는 일. 마주 앉은 사람의 그릇에 숟가락을 담근다. 허락하고 허락받는 일. 한 냄비에서 순서 있게 퍼주는 모습보다 각자의 그릇을 주문하고 허락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뜨끈뜨끈, 모락모락, 오붓오붓, 호호. 겨울의 단어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있다.


f86cf50c65455.png

10:44

간밤에는 침대에 누워서 하염없이 창밖을 보았다. 14층 오션뷰 숙소, 창밖의 허공 속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네모난 창문이 액자처럼 그 모습을 담았다. 작디작은 눈송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은 눈송이가 방향 없이 섞였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방향으로 춤을 췄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게 그런 모습일까. 침대에서 일어나 카메라를 들었으나, 전혀 담기지 않았다. 나는 밤새 이 눈보라를 볼 수도 있었다. 아무렴 어때... 산다는 일... 저 눈보라를 나는 표현할 수 없다. 사진으로 담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광경이었기에, 표현하지 못한 만큼 잊지 못할 것이다.



55ab8e710afb8.png


b3a8f325fb47f.png


12:50

여행이 발산하는 수많은 우연들 중에서 가장 서러운 우연은 방 배정의 우연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도시와 어떤 마을을 다시 여행할 수는 있지만, 똑같은 방을 배정받을 확률은... 무의미할, 아니 희미할 것이다. 어제 본 광경을 다시 보고 싶다고 언젠가 다시 온들, 같은 창문 같은 눈보라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 숙소에서는 연달아 이틀을 묵으니, 오늘 밤도 기대해보려고 한다. 여운이 기이이이일다 -


7665ffdb4a7be.png

0cf00bc1cb8c7.png

6630fe819f1b4.png





ca23aa0b5d424.png

9a4a5442c7bef.png


15:34

사우나에 와 있다. 온천이 아니라. 이번 여행 일정에 사우나를 추가한 이유는, 이전 일본 여행에서 온천과 료칸은 가보았는데, 대중목욕탕 경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으로 왔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맵시가 궁금하니 말이다. 사우나 이름은 오스파(O-Spa). 일단 이름이 씩씩해서 호감이 들었다. 오타루 스파라서 오스파라니. 씩씩해도 너무 씩씩하다. 너무 최신식이 아니라 정감도 갔다. 한국 돈으로 10,000원이 좀 넘는 가격이다. 카운터에서 타올과 유카타를 받아서 남탕으로 탕탕탕. 탈의실 사물함도 어찌나 정갈한지... 나 또한 정갈하게 옷을 벗었다.


d7e2131c755af.png

34213835dd2d0.png


탕은 한국의 여느 대중탕처럼 몇 가지 다른 온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노천탕이 있어서 온천도 부럽지 않았다. 노천탕에는 나무들이 있었고 빈 가지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나무를 비켜내린 눈은 내 몸에서 녹았다. 노천탕에는 탕 바깥으로 편의점 의자가 4개 있었는데, 뜨거워진 몸을 식히는 용도인 것 같았다. 나도 탕에서 나가 알몸으로 그 의자에 앉아보았는데, 내 옆의 나무처럼 눈이 쌓이지는 않았다. 다만, 뜨거운 몸으로 차가운 눈을 맞으니 모처럼 솔직해진 기분이었고 아름다움이란 아름답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69e4bff29182d.png

2e6b208fa688c.png

f8b3f246c4507.png

f577247197798.png

715b8a5bf202b.png



35cfb5fa32abd.png



20:59

눈길을 오르고 또 내려가는 요령을 익히느라 하루가 다 갔다. 하얀 페이지를 나아가는 글자들처럼, 나도 오늘은 하얀 눈길을 나아갔네. 내일은 다시 삿포로.


8352781540eb2.png

0808916c7ac09.png

2da5edb5b6aaa.png

48dc8749e0aa0.png

7415b1805d932.png

a88e4a24eba05.pn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