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2022. 12. 08. 목요일
07:59
오타루 역에서 조금 더 외곽에 있는 요이치 역으로 가는 열차에서.


삿포로에서 멀리 오타루까지 왔지만, 여기서 조금 더 멀리로 가는 중이다. 월요일 점심에 도착해서 금요일 아침에 떠나니 4박 4일 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중 절반을 오타루에서 보냈다. 새하얀 곳으로 가면, 나란 사람도 조금은 하얘질 수 있을까. 떠나오기 전에 썼던 문장이었다. 그리고 내 안에 오래 숨어있던 상념들은 온통 새하얀 풍경 속에서 빛을 받았다.
요 며칠 눈길을 걸으며 몇 번을 미끄덩했지만 다행히 한 번도 꽈당하지는 않았다. 중심을 잡았다고 하기가 어색한 까닭은 만화 속 인물처럼 허공에서 파닥거렸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오타루에 올 생각이 있다면 아이젠을 추천하고 싶다. 종아리까지 덮는 신발도. 눈이 꽤 높이 쌓인다. 삿포로는 도시라서 오타루보다 제설작업이 원활한 것 같다. 아 참, 니트비니도 추천하고 싶다. 양쪽 귀와 미간, 눈썹까지 덮는...
타야 하는 열차의 배차 시간이 길어서 아침 8시 전에 나왔다. 호텔에서 나와 열차를 타러 가는 길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온몸에 눈이 붙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젖는 일과 말리는 일이 일상일까. 겨울 내내 내리는 눈을 반가워할 수 있을까. 참 이쁘다, 참 반갑다, 느낄 수 있을까. 일상이 되면 낭만은 사라지곤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런 책이 있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읽지는 않았다.



08:06
지금 향하는 곳은 위스키 양조장이다. '닛카'라는 위스키의 양조장인데, 알고 있던 브랜드는 아니다. 투어는 무료지만 예약이 필요한 곳이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케쯔루라는 사람이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여성과 결혼해서 일본에 돌아와 만들었다는 블라블라... 여기가 다케쯔루의 고향은 아니고, 닛카 위스키의 고향이란다. 일본 북해도의 맑은 공기와 바닷바람이 위스키에 스며든다나... 공기고 바람이고 기체라서 스며드는 수밖에 없으면서...
08:12
이 열차는 그리 넓진 않다. 출근 차림으로 보이는 현지인들과 캐리어를 든 여행객들이 빼곡하다. 창밖으로 하얀 설원 위에 또 하얀 눈이 내리는데, 열차는 아랑곳없이 나아간다. 한국이었다면 조금 두려웠을 것 같다. 눈이 정말 많이 오는데... 하지만 열차 속 그 아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일상처럼 보인다. 나도 이 일상에 숨어서 조금은 덜 두려워해 본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는지에 따라 긴장감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 같다. 난방도 빵빵하다. 패딩을 벗고 싶은데 양옆으로 불편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버텨본다.





잠시 눈이 그쳤지만 나뭇가지에서는 계속 눈이 내렸다.

위스키를 시음할 수 있었다.
11:28
양조장에서 위스키를 마셨고, 삿포로로 오는 열차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잠이 들기 전에 미리 눈을 몇 번 감아보았는데, 일부러 눈을 감아본 게 오랜만이었다. 하얀 세상에서는 눈을 감아도 까맣지 않았다. 지금은 창밖으로 하양이 줄었다. 눈의 마을에서 다시 눈의 도시로. 삿포로 역을 앞두고 있다.

12:01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이 아니라 호스텔인데, 얼마 전 알게 된 책방 사장님으로부터 추천받은 곳이다. 호스텔 1층 식당의 맛이 무척 좋았던 곳이라고 말씀해주셨다. 4년 정도 전이라 식당이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스텔은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1층 식당에서 이 노트를 펼쳤다.


영화 <안경>에서 볼 법한 일본 중년 여성 두 분이 상냥하게 반겨주었다. 정식이 있고, 스프링롤이 자신 있다고 한다. 주방에 붙은 바 자리에 다섯 명, 4인 테이블과 2인 테이블이 하나씩 있는 소담한 식당이다. 삿포로 역에서는 전철로 두 정거장 정도 거리가 있어서 거리도 조용하다. 음악이 흐르지 않아서, 주방에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목소리와 데운 기름에 상냥하게 떨어진 튀김 소리가 들린다. 감상할 만하다. 두 사람은 나에게 학생이냐 물었고, 내 대답에 깔깔댔다. 나의 대답은, 혼또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나저나 한국말로는 '진짜'나 '정말' 같은 성의없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어서 자꾸 쓰게 된다.
12:25
사흘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최고다. 너무 맛있어서, 아니 혼또니 오이시라 얼굴 근육이 막 움직였다. 정식에 나온 밥은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모를 게 송송 썰려 있었고, 밥알 사이에 큐민처럼 보이는 게 섞여 있었다. 젓가락으로 한 입 먹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내 밥그릇을 보여주며 큐민데스? 하고 물으니 큐민이 아니고 일본어로는 산쇼라고 했다. 찾아보니 산초다. 산초를 가루로만 봐왔지, 알갱이로는 처음 보았는데, 산초의 맛처럼 새초롬하게 생겼다.
맛있다. 맛이 있다. 새로운 맛을 있게 했다. 가지고 있던 단어로는 당장 표현하기 어렵다. 새로운 맛에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 언젠가 내가 원하는 주방이 생기고 숙련도 되면, 새로운 맛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 사람들을 초대해야지, 초대 없이 손님도 받아봐야지, 제철을 만나러 매일 시장에 가야지.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틈틈이 근사한 그릇을 모으는 일. 그리고 저 두 사람의 상냥한 동작을 따라 하는 일.

12:44
체크인은 3시 30분. 식사를 마치고 짐을 미리 맡기려 하는데, 바깥의 책방에다 맡기면 된다고 했다. 호스텔이 책방을 같이 한다고? 은은한 나무 인테리어의 책방을 보니 우리 책방 생각이 났다. 아, 나 지난주에 책방 그만뒀지. 그래도 여전히 우리 책방이다. 아무튼, 일본어로 말을 거는 남자 사장님. 일본어를 잘 못 한다고 하니 바로 영어로 말해준다. 우리 사장님도 영어 잘하는데. 아무튼아무튼, 이 아저씨도 눈이 참 맑다. 이 아저씨'도'라고 말한 것은 우리 사장님도 눈이 참 맑기 때문이다. '참' 맑다라는 표현은 혼또니와 달리 무성의한 표현은 아니고, 오히려 성의 있는 표현이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드리듯, 참이라는 한 글자를 공손하게 드리는 것. 그나저나, 맑은 눈을 가지려면 책방을 해야 할까? 눈의 도시에서 눈까지 생각하게 될 줄이야...


P.S 일본 이름이 생겼다. 책방 사장님이 내 이름 'KANG KITAEK'을 보고 "키쿤"이라 부르면 되냐고 묻길래, 소름이 돋아서 얼떨결에 맞다고 해버렸다. 나느 오느부로 키쿤이 되었쿤...


15:00
삿포로 마지막 코스는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던 모에레누마 공원. 가는 길이 정말 험했다. 사흘 중 가장 심한 눈보라... 헛웃음이 났다.

지도상으로 도보 25분 정도라고 했는데, 45분째 걸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걸으니 쉽지 않다. 두 발이 눈에 빠진 채 찍어서 사진이 기울었다.

눈에 누워버렸다. 폭신했다. 움직이지 않았지만 자유로웠다.


저 멀리 사람이 보였다. 궁금했다. 진짜 사람인지. 너무 힘들어서 환상인지.




눈이 높이 쌓인 길은 얼마나 깊을지 몰라서, 누군가 디뎠던 자리를 밟는다.

누군가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기도 하지만, 발 사이즈는 다르니까, 보폭의 차이가 있으니까, 따라 걸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발자국을 찍는 설렘이 그들에게는 없다.

오른쪽 구름은 눈구름이다. 오늘은 위에서 내리는 눈이 아니라 옆에서 나에게로 휘몰아치는 눈을 보았다.

하얗게 잊었다. 고생했던 지난 몇 달과 수고했던 지난 몇 년을. 한때의 공간과 한때의 시간에 최대한 예의를 다하는 방법은 느닷없는 풍경과 이름 모를 걸음인 것 같다.

내려오다 뒤돌아본...






다음 이야기를 바로 다음 페이지에 써 내려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쓸 자리가 있어도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그 왼쪽을 공백으로 두고 오른쪽에서 쓰기를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시작점이 있다. 이번 여행은 그런 공백이었다. 아직 노트는 충분하다.
멀리에서, 태재 드림.
DAY 4
2022. 12. 08. 목요일
07:59
오타루 역에서 조금 더 외곽에 있는 요이치 역으로 가는 열차에서.
삿포로에서 멀리 오타루까지 왔지만, 여기서 조금 더 멀리로 가는 중이다. 월요일 점심에 도착해서 금요일 아침에 떠나니 4박 4일 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중 절반을 오타루에서 보냈다. 새하얀 곳으로 가면, 나란 사람도 조금은 하얘질 수 있을까. 떠나오기 전에 썼던 문장이었다. 그리고 내 안에 오래 숨어있던 상념들은 온통 새하얀 풍경 속에서 빛을 받았다.
요 며칠 눈길을 걸으며 몇 번을 미끄덩했지만 다행히 한 번도 꽈당하지는 않았다. 중심을 잡았다고 하기가 어색한 까닭은 만화 속 인물처럼 허공에서 파닥거렸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오타루에 올 생각이 있다면 아이젠을 추천하고 싶다. 종아리까지 덮는 신발도. 눈이 꽤 높이 쌓인다. 삿포로는 도시라서 오타루보다 제설작업이 원활한 것 같다. 아 참, 니트비니도 추천하고 싶다. 양쪽 귀와 미간, 눈썹까지 덮는...
타야 하는 열차의 배차 시간이 길어서 아침 8시 전에 나왔다. 호텔에서 나와 열차를 타러 가는 길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온몸에 눈이 붙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젖는 일과 말리는 일이 일상일까. 겨울 내내 내리는 눈을 반가워할 수 있을까. 참 이쁘다, 참 반갑다, 느낄 수 있을까. 일상이 되면 낭만은 사라지곤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런 책이 있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읽지는 않았다.
08:06
지금 향하는 곳은 위스키 양조장이다. '닛카'라는 위스키의 양조장인데, 알고 있던 브랜드는 아니다. 투어는 무료지만 예약이 필요한 곳이었다.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케쯔루라는 사람이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여성과 결혼해서 일본에 돌아와 만들었다는 블라블라... 여기가 다케쯔루의 고향은 아니고, 닛카 위스키의 고향이란다. 일본 북해도의 맑은 공기와 바닷바람이 위스키에 스며든다나... 공기고 바람이고 기체라서 스며드는 수밖에 없으면서...
08:12
이 열차는 그리 넓진 않다. 출근 차림으로 보이는 현지인들과 캐리어를 든 여행객들이 빼곡하다. 창밖으로 하얀 설원 위에 또 하얀 눈이 내리는데, 열차는 아랑곳없이 나아간다. 한국이었다면 조금 두려웠을 것 같다. 눈이 정말 많이 오는데... 하지만 열차 속 그 아무도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일상처럼 보인다. 나도 이 일상에 숨어서 조금은 덜 두려워해 본다. 어떤 사람들 사이에 있는지에 따라 긴장감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 같다. 난방도 빵빵하다. 패딩을 벗고 싶은데 양옆으로 불편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버텨본다.
잠시 눈이 그쳤지만 나뭇가지에서는 계속 눈이 내렸다.
위스키를 시음할 수 있었다.
11:28
양조장에서 위스키를 마셨고, 삿포로로 오는 열차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잠이 들기 전에 미리 눈을 몇 번 감아보았는데, 일부러 눈을 감아본 게 오랜만이었다. 하얀 세상에서는 눈을 감아도 까맣지 않았다. 지금은 창밖으로 하양이 줄었다. 눈의 마을에서 다시 눈의 도시로. 삿포로 역을 앞두고 있다.
12:01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이 아니라 호스텔인데, 얼마 전 알게 된 책방 사장님으로부터 추천받은 곳이다. 호스텔 1층 식당의 맛이 무척 좋았던 곳이라고 말씀해주셨다. 4년 정도 전이라 식당이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스텔은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1층 식당에서 이 노트를 펼쳤다.
영화 <안경>에서 볼 법한 일본 중년 여성 두 분이 상냥하게 반겨주었다. 정식이 있고, 스프링롤이 자신 있다고 한다. 주방에 붙은 바 자리에 다섯 명, 4인 테이블과 2인 테이블이 하나씩 있는 소담한 식당이다. 삿포로 역에서는 전철로 두 정거장 정도 거리가 있어서 거리도 조용하다. 음악이 흐르지 않아서, 주방에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목소리와 데운 기름에 상냥하게 떨어진 튀김 소리가 들린다. 감상할 만하다. 두 사람은 나에게 학생이냐 물었고, 내 대답에 깔깔댔다. 나의 대답은, 혼또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그나저나 한국말로는 '진짜'나 '정말' 같은 성의없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어서 자꾸 쓰게 된다.
12:25
사흘 동안 먹은 음식 중에 최고다. 너무 맛있어서, 아니 혼또니 오이시라 얼굴 근육이 막 움직였다. 정식에 나온 밥은 오징어인지 문어인지 모를 게 송송 썰려 있었고, 밥알 사이에 큐민처럼 보이는 게 섞여 있었다. 젓가락으로 한 입 먹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내 밥그릇을 보여주며 큐민데스? 하고 물으니 큐민이 아니고 일본어로는 산쇼라고 했다. 찾아보니 산초다. 산초를 가루로만 봐왔지, 알갱이로는 처음 보았는데, 산초의 맛처럼 새초롬하게 생겼다.
맛있다. 맛이 있다. 새로운 맛을 있게 했다. 가지고 있던 단어로는 당장 표현하기 어렵다. 새로운 맛에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 언젠가 내가 원하는 주방이 생기고 숙련도 되면, 새로운 맛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 사람들을 초대해야지, 초대 없이 손님도 받아봐야지, 제철을 만나러 매일 시장에 가야지.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틈틈이 근사한 그릇을 모으는 일. 그리고 저 두 사람의 상냥한 동작을 따라 하는 일.
12:44
체크인은 3시 30분. 식사를 마치고 짐을 미리 맡기려 하는데, 바깥의 책방에다 맡기면 된다고 했다. 호스텔이 책방을 같이 한다고? 은은한 나무 인테리어의 책방을 보니 우리 책방 생각이 났다. 아, 나 지난주에 책방 그만뒀지. 그래도 여전히 우리 책방이다. 아무튼, 일본어로 말을 거는 남자 사장님. 일본어를 잘 못 한다고 하니 바로 영어로 말해준다. 우리 사장님도 영어 잘하는데. 아무튼아무튼, 이 아저씨도 눈이 참 맑다. 이 아저씨'도'라고 말한 것은 우리 사장님도 눈이 참 맑기 때문이다. '참' 맑다라는 표현은 혼또니와 달리 무성의한 표현은 아니고, 오히려 성의 있는 표현이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드리듯, 참이라는 한 글자를 공손하게 드리는 것. 그나저나, 맑은 눈을 가지려면 책방을 해야 할까? 눈의 도시에서 눈까지 생각하게 될 줄이야...
P.S 일본 이름이 생겼다. 책방 사장님이 내 이름 'KANG KITAEK'을 보고 "키쿤"이라 부르면 되냐고 묻길래, 소름이 돋아서 얼떨결에 맞다고 해버렸다. 나느 오느부로 키쿤이 되었쿤...
15:00
삿포로 마지막 코스는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던 모에레누마 공원. 가는 길이 정말 험했다. 사흘 중 가장 심한 눈보라... 헛웃음이 났다.
지도상으로 도보 25분 정도라고 했는데, 45분째 걸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걸으니 쉽지 않다. 두 발이 눈에 빠진 채 찍어서 사진이 기울었다.
눈에 누워버렸다. 폭신했다. 움직이지 않았지만 자유로웠다.
저 멀리 사람이 보였다. 궁금했다. 진짜 사람인지. 너무 힘들어서 환상인지.
눈이 높이 쌓인 길은 얼마나 깊을지 몰라서, 누군가 디뎠던 자리를 밟는다.
누군가 내 발자국을 그대로 밟기도 하지만, 발 사이즈는 다르니까, 보폭의 차이가 있으니까, 따라 걸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발자국을 찍는 설렘이 그들에게는 없다.
오른쪽 구름은 눈구름이다. 오늘은 위에서 내리는 눈이 아니라 옆에서 나에게로 휘몰아치는 눈을 보았다.
하얗게 잊었다. 고생했던 지난 몇 달과 수고했던 지난 몇 년을. 한때의 공간과 한때의 시간에 최대한 예의를 다하는 방법은 느닷없는 풍경과 이름 모를 걸음인 것 같다.
내려오다 뒤돌아본...
다음 이야기를 바로 다음 페이지에 써 내려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쓸 자리가 있어도 페이지를 넘긴다. 그리고 그 왼쪽을 공백으로 두고 오른쪽에서 쓰기를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시작점이 있다. 이번 여행은 그런 공백이었다. 아직 노트는 충분하다.
멀리에서, 태재 드림.